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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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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졌으며,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여야의 위치에서 경쟁하는 등 정치 지형의 변화 속에서 진행되었다. 주요 후보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민주당의 김대중,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등이 있었으며, 김영삼 후보가 '안정 속 개혁'을 내세워 당선되었다. 선거 결과는 지역주의 구도를 드러냈으며, 김영삼 당선 이후 문민정부가 출범하며 군사 정권 시대가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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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지도 정보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도별 결과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도별 결과
기본 정보
선거 유형대통령 선거
선거일1992년 12월 18일
이전 선거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87년
다음 선거199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다음 선거 연도1997년
투표율81.9% ( 7.3%p)
후보자별 정보
김영삼 대통령 초상화
김영삼
정당 1민주자유당
득표수 19,977,332
득표율 141.96%
김대중 대통령 초상화
김대중
정당 2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
득표수 28,041,284
득표율 233.82%
정주영
정주영
정당 3통일국민당
득표수 33,880,067
득표율 316.31%
박찬종
박찬종
정당 4신정치개혁당
득표수 41,516,047
득표율 46.37%
선거 결과
당선자김영삼
당선 정당민주자유당
선거 전 대통령노태우
선거 전 대통령 소속 정당무소속

2. 배경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이전의 선거들과는 달리,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선거 방식이 바뀌던 관행에서 벗어나 13대 대선과 동일한 방식으로 치러졌다. 또한 야권 경쟁자였던 김영삼김대중이 여야 대표로 맞붙었고, 군 출신이 아닌 민간인 후보 간의 대결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5]

1987년 대선에서 3위를 한 김대중현대그룹 회장 정주영도 출마했다. 이번 대선에서는 민주화보다는 침체된 한국 경제 회복이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5]

2. 1. 정치 지형의 변화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탄생하며 정치 지형에 큰 변화가 있었다. 13대 총선 결과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당 민주정의당은 정국 주도권 회복을 위해 김영삼통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여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1] 정주영현대그룹의 재력을 바탕으로 통일국민당을 창당, 14대 총선에서 31석을 확보하며 제3당으로 부상했다.[1]

3. 각 당의 후보 선출

wikitext

1992년 11월 25일 후보 등록 마감 시점에 총 8명의 후보가 등록했다.

번호후보정당비고
1김영삼민주자유당
2김대중민주당
3정주영통일국민당
4이종찬새한국당1992년 12월 12일 후보 사퇴, 정주영 지지
5박찬종신정치개혁당
6이병호정의당
7김옥선무소속
8백기완무소속


3. 1. 민주자유당

민자당은 1992년 5월 19일 전당대회에서 통일민주당 출신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민주자유당 전당대회는 5월 19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렸다. 부산 출신의 9선 국회의원 김영삼이 서울 출신의 4선 의원 이종찬을 누르고 후보로 지명되었다.

과반수 획득에 필요한 대의원 수: 3,331명
후보획득 대의원 수득표율
김영삼4,41866.34
이종찬2,21433.24
무효/기권280.42
총계6,660100%



경선 과정에서 이종찬 후보와의 경쟁이 있었으나, 김영삼 후보가 대의원 투표에서 66.3%의 득표율로 승리했다.[2]

3. 2. 민주당

민주당은 1992년 5월 26일 전당대회를 열어 김대중 공동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3] 이 전당대회는 5월 25일부터 26일까지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개최되었으며, 김대중 후보는 전남(南) 6선 의원으로서 부산 7선 의원인 이기택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당시 전당대회에 참석한 대의원 2,426명 가운데 1,443명이 김대중 계였고, 이기택 계는 983명에 불과해 김대중의 후보 지명은 이미 확실시되고 있었다.[3]

당선에 필요한 대의원 수: 1,170명
후보대의원 수득표율
김대중1,41360.18%
이기택92539.40%
무효표/기권100.43%
합계2,338100%



이후 김대중 후보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였으며, 이로써 세 번째 대선 패배를 기록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3. 3. 통일국민당

1992년 5월 15일 통일국민당 전당대회에서 정주영 대표최고위원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1] 정주영 후보는 기립 표결을 통해 당내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후보로 선출되었다.[1]

정주영 후보는 자신이 이끄는 현대그룹의 막강한 조직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초반 선전을 펼쳤으나, 김영삼, 김대중 후보와 달리 지역적 고정 지지층이 없었고, 선거 중반 금권 선거 논란에 휩싸이면서 초반의 상승세를 유지하지 못하였다.[2]

3. 4. 새한국당

1992년 11월 17일 새한국당 창당대회에서 이종찬 대표최고위원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1] 민주자유당 경선에서 탈락한 이종찬 후보는 새한국당을 창당하여 대선에 도전했으나, 1992년 12월 12일 정주영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했다.[1]

번호후보정당비고
4이종찬새한국당1992년 12월 12일 후보 사퇴, 정주영 지지 선언.


3. 5. 신정치개혁당

1992년 6월 9일 신정치개혁당 전당대회에서 박찬종 대표최고위원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1] 1992년 11월 25일 후보 등록 마감 시점에 박찬종은 5번을 부여받아 등록을 마쳤다.[1]

3. 6. 군소 후보



1992년 11월 1일, 민중대통령후보선거대책본부는 민중대통령후보 선출대회에서 백기완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7]

김옥선신한민주당 부총재는 1992년 8월 26일 무소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으며, 유권자 6,490명의 추천을 받아 11월 24일 후보로 등록하였다.

대한정의당은 1992년 11월 18일 창당대회를 개최하고 이병호 창당준비위원장을 총재와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8]

진리평화당은 1992년 10월 24일 창당대회를 개최하고 대선 준비에 나섰으나, 허경영 전 당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내정했다가 후보 등록 마감일인 11월 25일 오후 임시 중앙위원회를 열고 현홍균 당 고문을 후보로 선출하는 등 혼란을 겪었고, 결국 후보 등록 마감 시간 전까지 선거 기탁금을 마련하지 못해 후보 등록을 포기하였다.[9]

친민당은 1992년 11월 15일 창당대회를 개최하고 한학자인 권정수 창당준비위원장을 총재와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으나, 선거 기탁금을 마련하지 못해 후보 등록을 포기하였다.[10]

진복기 기독성민당 총재는 1992년 9월 26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으나, 11월 25일 오후 기탁금을 마련할 능력은 있지만 각 당이 금권조직을 이용한 불법 사전 선거 운동을 해 불공정 선거가 됐으므로 후보 등록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10]

4. 선거 운동

14대 대선은 영남과 호남의 지역 대결 구도가 뚜렷했다. 김영삼 후보는 영남을 기반으로, 김대중 후보는 호남을 기반으로 경쟁했다. 정주영 후보는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를 중심으로 충청도 지역을 공략하며 새로운 지역주의를 개척하려 했다.[11]

정주영 후보는 재벌 해체, 반값 아파트 등 파격적인 공약으로 주목받았다.[11]

김대중 후보는 농촌 유권자들의 여당 지지 성향을 비판하며 유권자의 책임을 지적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는 "3백64일 야당하다가 선거날에만 여당하는 농촌 유권자들은 이제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13]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발언이 유권자들의 반발을 샀다고 평가한다.

지역김영삼김대중정주영박찬종백기완김옥선이병호
colspan="2" |colspan="2" |colspan="2" |colspan="2" |colspan="2" |colspan="2" |colspan="2" |
득표수%득표수%득표수%득표수%득표수%득표수%득표수%
서울2,167,29836.412,246,63637.751,070,62917.99381,5356.4167,7841.1413,0980.224,7970.08
부산1,551,47373.34265,05512.53133,9076.33139,0046.5721,7361.033,2360.159780.05
대구690,24559.6090,6417.83224,64219.40136,03711.7512,7721.102,7530.241,1030.10
인천397,36137.27338,53831.75228,50521.4384,2117.9012,4551.173,8670.361,3510.13
광주14,5042.13652,33795.858,0851.192,8270.421,5650.231,1490.171330.02
대전202,13735.19165,06728.74133,64623.2764,52611.235,7721.002,2940.409610.17
경기1,254,02536.331,103,49831.97798,35623.13239,1406.9336,3921.0513,6850.406,2990.18
강원340,52841.51127,26515.52279,61034.0956,1996.859,5991.174,0070.493,0470.37
충북281,67838.26191,74326.05175,76723.8868,9009.368,6711.184,5680.624,8440.66
충남351,78936.94271,92128.55240,40025.2464,1176.7310,1851.079,8991.044,1430.43
전북63,1755.68991,48389.1335,9233.239,3200.844,2320.387,1300.641,0870.10
전남53,3604.201,170,39892.1626,6862.107,2100.573,3110.268,0100.631,0480.08
경북991,42464.73147,4409.63240,64615.71124,8588.1517,6641.156,2400.413,3650.22
경남1,514,04372.32193,3739.24241,13511.52115,0865.5022,8631.095,0700.242,0200.10
제주104,29239.9885,88932.9242,13016.1523,0778.853,6471.401,2860.495630.22
합계9,977,33241.968,041,28433.823,880,06716.321,516,0476.38238,6481.0086,2920.3635,7290.15
출처: [http://info.nec.go.kr/ 중앙선거관리위원회]


5. 선거 결과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81.9%의 투표율(선거인 수 29,422,658명 중 24,095,170명 투표)을 기록했다.[6] 이번 선거는 정치 체제의 민주화가 주요 쟁점이었던 이전 선거들과 달리, 침체된 한국 경제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가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김영삼(민주자유당), 김대중(민주당), 정주영(통일국민당) 후보의 3파전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41.9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김대중 후보는 33.82%, 정주영 후보는 16.31%를 득표했다. 이로써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3대에 걸쳐 이어져 온 군사 정권이 종식되고 문민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5]

제14대 대통령 선거 결과
당락후보자정당득표수득표율
(%)
당선김영삼민주자유당9,977,33241.96%
align="center" |김대중민주당8,041,28433.82%
align="center" |정주영통일국민당3,880,06716.31%
align="center" |박찬종신정치개혁당1,516,0476.37%
align="center" |백기완무소속(야권)238,6480.99%
align="center" |김옥선무소속86,2920.36%
align="center" |이병호정의당35,7390.15%


5. 1. 지역별 결과

김영삼은 총 득표율 41.96%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는 그의 지역구인 부산광역시경상남도의 인구가 많은 것에 기인한다. 김대중은 광주광역시전라남도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전라북도에서도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으나, 서울특별시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우세를 확보하지 못했다. 반면 김영삼은 연고 지역에서의 결속력이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호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고른 득표율을 보여, 제13대 노태우 대통령보다 더 높은 득표율로 승리했다.[6]

지역별 선거 결과 (주요 4명의 후보만 기재, 득표수 아래 괄호 안은 득표율)
김영삼
(민자당)
김대중
(민주당)
정주영
(국민당)
박찬종
(신정당)
합계9,977,332
(41.96%)
8,041,284
(33.82%)
3,880,067
(16.31%)
1,516,047
(6.37%)
서울특별시2,167,298
(36.41%)
2,246,326
(37.74%)
1,070,629
(17.98%)
381,535
(6.41%)
부산광역시1,551,473
(73.74%)
265,055
(12.52%)
133,907
(6.33%)
139,004
(6.57%)
대구광역시690,245
(59.59%)
90,641
(7.82%)
224,642
(19.39%)
136,037
(11.74%)
인천광역시397,361
(37.26%)
338,538
(31.74%)
228,505
(21.42%)
84,211
(7.89%)
광주광역시14,504
(2.13%)
652,337
(95.84%)
8,085
(1.18%)
2,827
(0.41%)
대전광역시202,137
(35.19%)
165,067
(28.73%)
133,646
(23.26%)
64,526
(11.23%)
경기도1,254,025
(36.33%)
1,103,498
(31.97%)
798,356
(23.13%)
239,140
(6.73%)
강원도340,528
(41.51%)
127,265
(15.51%)
279,610
(34.08%)
56,199
(6.85%)
충청북도281,678
(38.26%)
191,743
(26.04%)
175,767
(23.87%)
68,900
(9.35%)
충청남도351,789
(36.93%)
271,921
(28.54%)
240,400
(25.24%)
64,117
(6.73%)
전라북도63,175
(5.67%)
991,483
(89.13%)
35,923
(3.22%)
9,320
(0.83%)
전라남도53,360
(4.20%)
1,170,398
(92.15%)
26,686
(2.10%)
7,210
(0.56%)
경상북도991,424
(64.72%)
147,440
(9.62%)
240,646
(15.71%)
124,858
(8.15%)
경상남도1,514,043
(72.31%)
193,373
(9.23%)
241,135
(11.51%)
115,086
(5.49%)
제주특별자치도104,292
(39.97%)
85,889
(32.92%)
42,130
(16.14%)
23,077
(8.84%)


6. 선거 이후

김영삼의 당선으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3대에[5] 걸쳐 이어져 온 군사 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문민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 선거는 한국 정치사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김영삼의 당선으로 이른바 3김 가운데 1김은 대통령으로서 공식적인 현역 정치를 마감했다. 김대중은 선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이후 야당 총재로 복귀하며 동교동계, 호남계 중심으로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김종필은 민주자유당 공화계로 김영삼 정부에서 2인자 역할을 수행하다 출당되었고, 이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여 충청도를 기반으로 다시 3김 정치 구도에 진입하였다.

한편, 김영삼은 민주자유당에서 공화계 김종필과 민정계 일부 인사들을 출당시킨 후, 당을 자신의 체제로 재편하고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1997년 IMF 사태로 인해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악의 국난을 겪었고, 김영삼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 국정 운영에 전념하며 선거 중립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에서 탈당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탈당 이후, 신한국당은 소수 야당인 민주당과 통합하여 한나라당으로 출범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Electoral Politics in South Korea http://library.fes.d[...] Friedrich Ebert Foundation
[2] 웹사이트 민자당 차기 대통령후보로 김영삼후보 결정[엄기영] http://imnews.imbc.c[...] 1992-05-19
[3] 뉴스 김대중후보 60.2% 득표, 이기택대표는 39.4% 얻어 http://news.mk.co.kr[...] 2018-04-24
[4] 웹사이트 국민당 정주영 후보,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에 선출[조동엽] http://imnews.imbc.c[...] 1992-05-15
[5] 기타
[6] 기타
[7] 웹인용 김옥선 씨 대통령 후보 등록 https://newslibrary.[...] 2019-06-18
[8] 기타
[9] 웹인용 후보 등록 마감 창구 "해프닝" 속출 https://newslibrary.[...] 2019-06-18
[10] 웹인용 군소 후보 3명 대선후보 등록 못해 https://newslibrary.[...] 2019-06-18
[11] 웹인용 정주영 대표 재벌해체론 파문 https://newslibrary.[...] 2019-03-27
[12] 뉴스 후보가 유세장서 유권자 비판 1992년 대선 김대중후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2-12-05
[13] 뉴스 표 잘못찍어 제 발등도 찍었다, 민주당 유권자 책임강조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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